흔히 IMF로 불리는 한국의 외환위기는 1997년에 발생한 사건인데요. 국내에서는 IMF가 워낙 큰 사건이었기에 한국에서만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시아 금융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IMF 사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으며, 이후 한국 사회의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IMF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드리려 합니다. IMF는 경제위기를 뜻하는 단어가 아닌,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줄임말입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라 다음 해 설립되어, 1947년부터 세계은행과 함께 업무를 하게 된 국제금융기구가 바로 IMF인데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경제학자와 정책담당자가 모여 전쟁 후, 세계 금융질서의 기준을 미국 화폐인 달러로 둔 고정환율제를 논의했는데요.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IMF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현재 190개의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한국은 1955년에 가입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국제 금융위기 해결사를 자처하는 IMF는 은행처럼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닌, 자금을 빌리는 나라와 협의하여 그 나라의 경제 정책에 개입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IMF의 배경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발전을 경험했는데요. 이러한 발전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기에 정부에서는 기업이 투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하였고, 많은 기업은 이러한 정책을 활용하여 외환 위기 사태가 발생 직전까지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여왔습니다.
문제는 이 투자금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들어온 투기자본이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금융기관에 해외자금을 차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었고, 이를 통해 금융기관들은 금리가 낮은 일본 등의 해외에서 자금을 대규모로 차입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1월에 대기업 한보가 부도를 맞이하면서, 외국 금융사들은 빌려준 자금을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투자 자금의 회수를 서두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정부가 기업의 부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자, 국내 자본은 빠르게 해외로 유출되었고 이를 한국의 은행들은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은행의 외채에 대해 지급보증을 했지만, 한국 정부도 은행의 외채를 대신 갚아줄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기에 외환위기는 가속화됩니다.
2. IMF 당시 상황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한국 언론사들은 한국 경제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수의 의견이 무색하게 한국이 안전하다는 식의 기사를 주로 발간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통해 국민들은 하지만 국민들을 안심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다수 기업이 줄지어 부도가 나는데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국내 3대 대기업이었던 대우그룹이 부도나게 됩니다.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건설을 자회사로 보유하고 있었던 대우그룹의 부도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밖에도 재계 순위 30대 기업 중에 11개의 그룹이 이때 파산하게 됩니다. 나라 안으로는 굴지의 기업들이 무너져내려가는 상황에서 나라 밖에서는 환율이 폭등하면서, 1달러가 자그마치 2,000원대를 넘어섰는데요. 이에 따라 수출은 어려워졌지만, 갚아야 하는 달러는 많이 필요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3. IMF 해결을 위한 국가의 노력
이러한 문제가 계속되자 한국은 경제 안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요청하는데요. IMF는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과 함께 한국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IMF의 주도로 이뤄진 한국 구제금융에는 총 570억 달러 규모의 금융 지원 패키지가 포함됐습니다. 이 패키지에는 상당한 경제 개혁과 구조 조정이 필요한 재정 지원과 정책 조건이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이 지원에 맞춰 한국은 재정 긴축 조치, 은행 부문 구조 조정, 노동 시장 개혁 등 일련의 개혁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과도한 기업 부채와 금융 부문의 투명성 부족 등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IMF에 받은 이 도움으로 인해, 국민들은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의 경제 운영에 대한 신뢰가 깨지게 되었고, 세계 금융시장에서도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4. IMF가 바꿔놓은 한국 사회
과도한 빚더미에 앉아 있던 한국의 기업들은 확장된 사업을 외국인 투자자에게 빨리 팔아넘겨야 살길을 모색할 수 있었는데요.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인수합병(M&A)시장이 열리게 됩니다. 거기에 IMF는 한국 정부에 긴축 재정과 은행 자금의 대출 절제를 요구합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긴축 예산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은행에는 고금리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요.
이 영향으로 이전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기업 중에 은행의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서 은행에 대출이 많았던 기업들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많은 기업들이 또 한 번 부도를 맞이하게 됩니다. 업의 부도와 인력 구조조정으로 실업자의 숫자는 급속하게 늘어가고, 정부의 복지시스템이 미흡했기에 이 피해는 온전히 취약계층에 돌아가게 되면서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됩니다.
5. 금 모으기 운동
IMF 사태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면 빠지지 않고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인데요. 한국 정부가 IMF로부터 195억 달러를 빌리며 국가적 경제 위기 상황에 닥치자 정부와 언론은 국민들에게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종용하는데요. 정부와 기업경영을 탓할 때가 아니고 전 국민이 힘을 모아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는 주장이 연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처음에는 달러 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달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 운동은 금을 모으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KBS에서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운동의 결과 당시 시세로 21억7천만 달러에 이르는 약 225톤의 금이 모였고, 전국적으로는 349만명이 이 캠페인에 참여했다고 하는데요.
다수의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캠페인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도 분명히 존재하는데요. 국가의 사회, 경제적 구조의 문제를 국민 애국심 문제로 치환하면서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묻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간 부분을 문제로 보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국의 금융 위기인 IMF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드렸는데요. 국가의 위기 상황을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으로 함께 헤쳐 나갔다는 점에서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2023.10.24 - [재테크/경제사건] - 기네스북에 기록된 세계 최대 규모파산, 리먼 브라더스 사태란?
2023.10.23 - [재테크/경제적 사건] -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탐구 : 시작을 알린 3가지 요인
2023.10.29 - [재테크/경제적 사건] - 영국이 EU를 벗어나려 했던 이유, 브렉시트란?
'재테크 > 경제적 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세 월세 차이, 한국에만 있는 부동산 임대방식 '전세'에 대해 (0) | 2023.12.26 |
---|---|
영국이 EU를 벗어나려 했던 이유, 브렉시트란? (0) | 2023.10.29 |
기네스북에 기록된 세계 최대 규모파산, 리먼 브라더스 사태란? (0) | 2023.10.24 |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탐구 : 시작을 알린 3가지 요인 (1) | 2023.10.23 |
DSR과 DTI 뜻, 계산하는 방법 (1) | 2023.08.10 |